미국의 추상화가 윌럼 드 쿠닝(1904∼1997)은 격정적이고 폭발적인 붓 터치의 추상화로 잘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연작인 ‘여인’은 눈 코 입이나 인체의 윤곽이 드러나는 듯하면서도 순식간에 거친 물감 덩어리로 무너져 추상과 구상을 오간다. 이런 스타일은 작가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기 시작한 1980년대 초부터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두껍게 얹히던 임파스토 기법은 사라지고, 리듬체조 선수가 공중에 휘날린 리본 같은 간결하고 리드미컬한 선이 등장한다. 이 시기의 대표작인 ‘무제 XIX’(1984)가 국내 전시에 출품됐다.
최근 서울 강남구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에서 개막한 ‘현대회화 하이라이트: 시대의 초상’전은 20세기 초부터 최근까지 작가 14명의 작품 20점을 선보인다. 전시 기획을 맡은 박미화 독립 큐레이터는 7일 기자들과 만나 “19세기 이후 미술에서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이뤄진 변화와 순환을 중심으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 속 작품들은 100호 이상 대작이 중심이며, 현대미술 작품이지만 회화로만 구성돼 붓 터치와 화면 구성을 감상하는 재미를 더했다.
드 쿠닝의 작품 옆에는 구사마 야요이(1929~2026)의 ‘인피니트 도트 (AB)’(2003)가 걸렸다. 어두운 바탕 위에 자홍색의 큰 점들이 화면 전체에 반복적으로 채워진 캔버스 작품이다. 구사마는 어린 시절 환시를 경험한 뒤 그림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 했는데, 이 그림에서는 초기의 강박적이고 반복적인 이미지와 달리 비교적 커다란 구를 화면에 채우면서 강렬한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된다. 초현실주의 작품을 다룬 ‘꿈의 산책’과 ‘난해한 추상’, ‘형상의 부활’ 순이다. 첫 번째 장 ‘꿈의 산책’에서는 벨기에 작가 폴 델보(1897~1994)의 작품 3점이 한 자리에 모여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1956년 작품 ‘크리스마스의 밤’은 전선과 선로가 복잡하게 얽힌 기차역의 풍경과 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뒷모습이 있는 그림이다.
기차역의 모습은 세밀한 필치로 자세하게 그렸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적막하다. 현실인지 꿈속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의 풍경을 그렸던 델보는 르네 마그리트, 조르조 데 키리코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델보의 작품과 함께 샤갈의 풍경화 ‘방스 주변’도 볼 수 있다.
이어지는 ‘난해한 추상’은 드 쿠닝과 구사마 등 20세기 추상화의 유산과 그것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작품을 조명한다. 마지막으로 ‘형상의 부활’에서는 데이비드 호크니, 살보, 조지 콘도, 니콜라스 파티와 아드리안 게니 등 최근 미술 시장에서 인기를 끈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호크니의 ‘더 많은 월드게이트 통나무, 2009년 10월 13일’은 호크니가 고향 요크셔의 시골길을 보고 그린 풍경화다. 호크니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기 직전 작품으로, 손수 캔버스를 들고 나가 풍경을 보면서 스케치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아드리안 게니의 ‘담배를 피우는 자화상’, 조지 콘도의 ‘경영진과 그들의 아내들’은 프랜시스 베이컨, 파블로 피카소 등 미술사에 남은 작가들의 화법을 차용하되, 현대적인 소재로 풀어내 소장가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게니의 작품 속에서는 베이컨의 작품에 나올 법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사람이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다. 콘도의 ‘경영진…’은 ‘아비뇽의 처녀들’을 연상케 하는 여성 누드와 기괴한 얼굴을 한 턱시도의 남자들을 함께 그렸다. 내년 1월 9일까지.
